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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에서 만난 띵작, 무정형의 삶

by passion_estar 2024. 9. 18.

북클럽과 함께 갈 여행을 앞두고 설레던 우리를 위해 친구가 책 선물을 보내주었다. 여행 전 힘빠지는 일이 많아 에너지가 바닥이었던 나는 글자만 봐도 토할 것 같았다. 책은 택배로 어김없이 도착했지만 휴가가 시작된 후에도 책을 집어들 힘조차 없었다.
“나는 읽어가지 않을래. 글자만 봐도 토 나오려고 해.”

시댁 식구들과 감포 바닷가로 여행 다녀오던 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가지 않아 몽롱한 기분 속에 터널로 차가 진입했다. 환한 햇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커먼 어둠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 지금 내 마음이 딱 이렇구나.”
끝날 기미가 없는 터널을 답답한 마음으로 보았다. 언제 끝나나, 이 답답한 공기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음이 요동을 칠수록 캄캄한 터널은 내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끝없이 이어졌다.

음악이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선 이어폰을 찾으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다 손에 딱 잡힌 건 <무정형의 삶>, 그런데 세상에! 이건 바로 김민철 작가의 책이었다. 한 자도 읽지 않으리라는 굳센 믿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이 책은 효진이가 선물했고 우리가 사랑하는 민철 작가의 책이었다. 휴가 기간이었고 우리는 곧 2박 3일의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쉼이 간절히 필요하던 시기에 프랑스 파리로의 두 달 살기 여행기라니. 너무 멋진 걸.

갑자기 햇살이 툭 터져나오며 사방이 밝아졌다. 이건 운명이야. 책 하나 들었을 뿐인데 터널로 들어오기 전의 나와 터널 밖으로 나온 나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모두가 지쳐 곯아 떨어진 차 안에서 남편은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나자 내 최애 책은 <모든 여행의 기록>에서 <무정형의 삶>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멋진 표현이 줄줄 쏟아져 나오다니, 이분은 분명 천재임에 틀림없다. 이분의 필력을 닮고 싶다는 생각에 집에 오자마자 필사를 시작했다. 읽으면 눈 앞에 펼쳐지는 파리의 풍경, 파리의 향기, 파리의 분위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통통 튀는 말로 가득 묘사되어 있었다.

한 달씩 한 집에서 두 번의 파리 살기라니.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루 이틀의 짧은 여행이 아니라 60일 남짓의 타향살이를 오롯이 혼자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곧 그 여행은 혼자만의 여행이 아닐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내 친구들이, 내 멋진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와 줄테니. 그럼 우리는 둘이 되었다 셋이 되었다 완전체인 넷이 되어 또 여행지를 활보하겠지.

지치고 외롭고 쓸쓸하던 마음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다 웃다 하며 책의 절반을 읽어버렸다. 차창 밖으로 자꾸만 파리의 풍경이 보였고 바게트 빵과 치즈의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틀에 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 문장이 있었다.

p305.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살지 마. 지금 나에게 온 오늘을 살아버려. 내일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고, 내일을 위해 참아야 하는 오늘을 끝내버려. 내일을 위해 너무 많은 걸 감내할 필요는 없어. 오늘도 인생이야. 아니, 오늘이 인생이야. 머나먼 내일 대신 오늘 하루를 원하는 모양으로 살아버려. 그렇게 원하는 모양의 하루하루가 모이면? 그럼 원하는 모양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좋았던 여행지를 떠나며 반 백살을 훌쩍 넘어버린 나는 생각하곤 했다.
‘나 여기 또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해서 자꾸 우울해지곤 했다. 그런 내게 민철 작가님은 돌아갈 수 있다고 자꾸만 용기를 준다.

p322. 나는 잊지 않았다. 내가 이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고 단 한순간도 그리움을 끝내지 않았다. 간절하게 간직했고, 애틋하게 그 꿈을 이뤘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어떤 모양으로 이 두 달을 채워나갈지. 이 모든 여정이 끝나는 곳의 나는 어떤 모양일지. 하지만 이제 명확하게 아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에 나를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어이 그 꿈에 착륙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책 마지막 문장처럼 작가님의 마음이 나에게 전염되었다. 멀지 않은 어느 날 나도 분명 나의 그곳에 도착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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