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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난 머나먼 방황의 끝,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by passion_estar 2024. 10. 5.

올해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하나씩 읽고 있다. 그간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 ‘싯다르타’ 등 헤세의 대표작을 읽어왔지만 9월에 읽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앞의 작품을 모두 아우르고도 남을 만큼 웅장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와 사랑’이라는 번역본으로도 소개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만난 상반된 성격의 두 젊은이가 앎(知)과 사랑으로 진짜 나를 만나고 성장해 가는 긴 여정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학생인 나르치스는 뛰어난 희랍어 실력과 사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들을 가르친다. 찬사와 흠모를 받기도 하지만 나르시스트이면서 독단적인 성격 탓에 시기와 질투를 받기도 한다.

고요한 수도원에 어느 날 골드문트라는 신입생이 들어온다. 곱상한 외모와 금발 머리의 골드문트는 첫날부터 나르치스의 호기심을 샀고 골드문트 또한 어린 나이에 벌써 선생이 된 나르치스에게 호감을 느낀다.

어느 날 밤 동급생들과 학교 담을 넘어 근처 농가로 가 소녀들을 몰래 만나고 돌아온 골드문트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이유도 모른 체 혼절해서는 며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미처 터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는 걸 간파한다.

골드문트는 유년 시절 집을 나간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가 너무도 그리웠지만 아들 또한 그런 운명을 걷게 될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금했다. 아예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하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나르치스 덕분에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두 소년은 진한 우정을 나눈다.

신학자로 살아가겠다는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르치스가 보기에 골드문트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성향을 띄고 있었기에 누구의 강요나 바람에 따라 살지 말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라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늙은 신부님의 심부름을 위해 수도원 밖으로 나온 골드문트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꿈 같은 하룻밤을 보낸 후 그녀를 따라 가리라 다짐한다. 단 하나의 친구이자 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던 나르치스에게 수도원을 나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히자 나르치스도 그를 말리지 않고 그의 앞날을 축복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골드문트의 긴 여행과 방랑이 시작된다.

20장,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어서 매일 조금씩 읽어 나갔다. 8월에 읽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황야의 이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했다. 심신의 안정 추구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나로서는 골드문트의 방랑길과 여성편력을 따라가는 여정에 많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길을 돌아가도 인간에게는 소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나르치스가 골드문트 안에 내재된 예술가를 미리 알아차렸듯 훌륭한 예술가가 되어 다시 조우한 걸 보면 말이다. 오랜 세월 죽음을 무릅쓰고 방랑하며 만난 인간 군상들의 집합체에 나르치스와 어머니의 형상까지 더해 훌륭한 조각상을 만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품에서 처연히 죽어간다.

너무나 방대하여 요약하기가 버거웠지만 세 가지 키워드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가 뽑은 키워드는 [1. 진짜 나 2. 우정 3. 조화]이다. 골드문트도 나르치스도 타인의 바람대로 살아가지 않았다. 비록 온갖 추태를 다 부리며 방황했지만 골드문트는 끝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을 통해, 나르치스는 학문을 통해, 진짜 나를 찾으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완전히 다른 성격이지만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는 두 친구의 우정도 귀감이 되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주는 성장소설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은 53세의 헤세가 그려낸 진정한 성장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며 정(正)반(反)합(合)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p465. 여행에서 돌아와 집에 와보니 이렇게 근사한 녀석이 되어 있을 줄이야! 청춘과 건강, 자신감, 불그스레하던 얼굴과 형형하던 눈매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도 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거울에 비친 이 노약한 사내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모습이었던 골드문트보다 더 좋았다.

가끔 거울을 들여다보며 늘어나는 기미와 주름에 한숨 쉬면서도 젊은 시절 격정적이고 전투적이었던 나보다 지금의 평온한 내가 더 좋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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